2001. 12. 『民族文化硏究』35,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인문정보학에 관한 구상

- 정보 기술에 대한 인문학의 대응 -


김   현*1)


1. 정보 기술의 도전

2. 지식정보화의 과제

3. 인문 지식 정보화 사업의 추진

4. 인문 지식 기반 정보 인력의 양성


  1. 정보 기술의 도전


  2001년 3월 전경련은 새로운 국가 발전전략으로 ‘eKOREA’를 주창하고 2005년까지 IT(정보기술) 전문인력 100만 명 양성 및 소프트웨어 산업 육성 등 범국가적 IT화 추진에 나선다고 발표하였다. 이를 위한 5대 추진전략으로 소프트웨어산업 육성,  IT 전문인력 양성,  B2B(기업간) 전자상거래 환경 구축,  IT인프라 구축,  관련 법령 정비 등을 제시하고 2005년까지 소프트웨어산업을 인도 수준으로 육성, 우리나라를 소프트웨어 생산 기지화 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왜 하필 인도인가?

  지난해의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수출 규모는 1억8천만 달러인 데 비해 인도는 63억 달러. 우리나라의 약 35배 수준이다. GDP 500달러에 불과한 개발도상국 인도가 정보 기술 분야에서는 한국의 발전 모델이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대학과 전문 교육기관에서 배출되는 풍부한 인적 자원이 인도를 정보 산업 선진국으로 이끈 요인이다. 이에 반해 한국의 정보 기술 산업은 그 시설 기반의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소프트웨어 개발 수요를 충당할 고급 인력의 보급이 뒷받침되지 않아 몇 년째 부진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해가 갈수록 고학력 실업자가 늘어가고 있는데 정보 기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교육 시스템이 인력 수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우리나라의 대학은 대학별 학생수 총정원제에 묶여 특정 분야의 인력 양성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다른 분야 전공자의 숫자를 줄여야만 한다. 화살은 엉뚱하게도 대학의 인문사회계로 돌려졌다. 취업율이 낮은, 다시말해 사회적인 수요가 적은 전공 학과를 축소 또는 폐지하고 그 정원을 정보 기술 쪽으로 돌려야 하는데, 대학의 인문계 종사자들의 반대로 그러한 방향 선회가 어렵다는 것이다. 정보통신 분야의 정책 관계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대학은 자율적인 현실 대응 능력을 상실한 집단이다. 그들 사이에서는 강제적인 조치를 통해 인력 수급의 불균형을 해소해야 된다는 주장마저 대두되고 있다.


  정보산업 관계자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대학의 인력 수급 불균형을 성토하고 있지만, 인문계 입장에서 보면 대학의 교육을 산업 수요에만 맞추어 재단하려는 정부와 산업계의 요구가 지극히 불균형적이라는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인문적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는  인력이 과연 산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고급 인력의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인도의 소프트웨어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의 수적인 우위에만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선진국의 소프트웨어 개발 수요에 쉽게 대응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은 사고 능력의 배양을 중시해 온 인도의 전통적인 문화가 우수한 소프트웨어 개발의 배경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정보 기술 분야의 인력은 양적인 면에서 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실무에서 요구되는 자질을 제대로 갖춘 인력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실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정보 기술을 전공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른바 전공 분야라고 하는 극히 제한적인 범위의 기술 이론과 지극히 초보적인 개발 기술만을 가지고 있을 뿐, 실제의 연구개발 업무에서 더욱 중시되는 의사소통 능력이나 문제 해결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소프트웨어 관련 기술은 시스템 소프트웨어와 응용 소프트웨어의 두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건축이나 토목에 비유하자면 건설 장비를 만드는 일은 전자에 해당되고 그 장비를 이용하여 아파트를 짓도 도시와 항만을 건설하는 일은 후자에 속한다. 전자가 더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라고 생각될지는 몰라도 시장 규모에서 있어서 양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70-80년대에 우리나라의 고도 성장의 한 축을 담당한 건설 산업에서 우리가 한 일, 그리고 지금 우리가 세계 수준이라고 자부하는 분야는 바로 후자에 속하는 일이다. 금융, 상품의 거래, 인력과 자재의 관리 그리고 지식의 유통에 이르기까지 컴퓨터를 가지고 수행하는 갖가지 ‘정보화’의 사업의 핵심은 바로 ‘응용 소프트웨어의 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을 수행함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업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추상적인 사이버 공간상에서 재구성될 수 있도록 하는 분석․설계의 능력이다.

  인문 지식을 다루는 훈련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에게 당연히 기대되는 논리적 사고 능력이나 언어를 통한 명확한 의사 소통의 능력이 우리의 정보 기술자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하다. 정보 산업 진흥과 관련하여 우리나라 대학 교육 시스템이 진정으로 받아야 할 비판은 인문 분야의 비중이 크다는 점이 아니라, 그 영향력이 정보 기술 인력에까지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대학의 인문학 종사자들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이공계 학과의 전공 이기주의의 벽이 너무 높아 인문 교육의 확산이 점점 어려워진다고 하는 것은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인문계 연구자들 스스로 쌓고 있는 전공의 벽은 어떠한가? 인문계열 학생들은 오로지 인문학만을 공부하고 이공계열 학생들은 기술분야와 인문분야의 지식을 함께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대학에서 인문분야의 지식을 주된 관심 분야(major)로 삼았던 학생들도 사회에 진출해서는 인력 수요가 큰 정보 기술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나 열어 두고 있는가?



 2. 지식정보화의 과제


  21 세기를 맞아 우리나라 국가경쟁력 제고 방안의 화두로 떠오른 ‘지식정보화’라는 말의 의미는 정보화의 목적이 과거와 같은 ‘업무 프로세스의 효율화’가 아닌 ‘지식의 공유’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지식을 공유한다는 것은 사회 각 분야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지식 자원이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형태로 개방되어 다양하게 응용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정보화의 목적이 이처럼 ‘지식의 공유’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문 지식의 사회적 확산을 추구하는 인문학자들이 학술 활동의 목표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인문학적 지식의 정보화에 대해 인문 분야 연구자들이 주저할 필요가 없으며,  적극적으로 정보화의 노력을 기울이면 그 가운데 정보 기술과의 학제적인 교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인문지식과 정보기술을 함께 아우르는 후학의 양성도 가능할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인문 분야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아직까지 그와 같은 사고방식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못하다.  ‘정보 기술’이라고 하는 것이 여전히 생소하게 여겨지는데다,  ‘기술’은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인데 그것이 ‘학문’과 대등한 입장에서 교류한다고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적지않은 인문학자들이 의식 속에 아직도 ‘지식의 독점’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다고 하는 점이다.

  수요는 많되 공급은 독점하는 것.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인들의 꿈이 이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만,  영리와는 무관한 듯한 학술 연구자들도 실은 이러한 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적으로 어떤 지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있는 상황에서  자기 혼자, 또는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는 그룹이 그 지식을 독점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면 그 반대 급부로서 누구나 인정해 주는 권위와 명성을 획득할 수 있다.

  한국의 인문학, 그 중에서도 우리의 전통문화를 탐구하는 국학 분야의 연구자들이 이러한 독점적 지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선배 지식인들이 전통시대에 향유한 성공의 경험 때문인 듯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윤리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인해 하층민까지도 유교적 지식을 존숭하는 풍토가 조성되었었고,  그 가운데 양반 사대부 계층만이 그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독점적으로 보유함으로써 사회 일반에 대한 지도자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관직이나 재력의 뒷받침이 없이도 지배자의 권위를 누릴 수 있었던 수 있었던 조선시대 각 고을 양반들의 지배 권력은 바로 유교적 지식의 수요-공급 구조에 의해 지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세인들이 지적 호기심이 다양해진 사회에서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분야의 지식 자원을 공개하는 데 인색하면서, 그 지식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증대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공유되지 못하는 지식, 대학의 전공학과의 울타리 안에서 그 구성원들만을 대상으로 전수되는 학문은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게 된다. 사회 일반인들은 그 폐쇄적인 지식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게 되고 그로부터 결과된 무관심과 몰이해는 그 학문의 존재 기반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인문학에 대한 제반 여건이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은 현시점에서 그것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문학자들이 인문 지식의 사회적 공유 체계를 만들어 내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모든 인문학자들이 원천 지식의 생산은 접어 두고 지식의 대중화의 길로 나서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흔히 지식의 사회화를 위한 노력이라고 하면,  학자들이 TV 방송에 출연해 대중 강연을 하거나, 시민 교양 강좌를 벌이는 것으로만 단정하기 쉽다. 그러한 일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정보화의 입장에서 말하는 지식의 사회화는 지식을 정보화 하여 타분야에 전파함으로써 새로운 지식의 창출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지식 사전의 편찬이나 고전 텍스트의 번역을 정보 환경 하에서 수행하여 그 성과물이 다른 분야 학문과의 학제적 연구나 언론 기사, 예술 창작의 소재로 손쉽게 쓰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문 지식의 정보화와 관련하여 인문학자들이 고집하는 또 하나의 그릇된 생각은 자신은 인문학자들은 연구에만 전념하면 되고 그것을 정보화 하는 일은 정보 전문가들이 담당할 일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인문학의 지식을 정보화 하는 정보 전문가는 누구인가? 상업적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제한된 범위의 자료를 디지털 간행물로  만들어서 도서관에 납품하는 전자출판 사업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즉각적인 투자비용 회수가 보장되는 극히 제한된 범위의 자료들일 뿐이다.

  인문학자들 대신해서 인문 지식을 정보화 해 줄 수 있는 정보전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 인문 지식은 공익성은 높으나 상업성이 없기 때문에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의 투자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며, 둘째, 정보 기술이 인문계 연구자들에게 생소한 것 이상으로 인문 지식이 정보 기술 전문가들에게는 난해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지식 정보화의 과제는 해당 분야의 지식 전문가들이 직접 활용 가능한 정보 기술을 도입하고 정보 편찬 업무에 참여함으로써 수행될 수 있다. 정보 기술의 도입 경험이 없는 초기에는 물론 기술 분야 전문가의 지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시적인 학습 과정으로서만 유효할 뿐이다. 정보 기술의 활용 능력 토대로 한 지식 정보의 생산은 언제까지나 그 연구 활동 당사자의 몫이다. 정보 기술에 익숙치 않은 우리 세대가 무리하게 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설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후학들에게는 그 길을 열어 두어야 한다.



  3. 인문 지식 정보화 사업의 추진


  인문학의 연구활동을 지식 정보의 공유 체제에 접목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원론적인 추진 전략을 먼저 구상해 본다면 그 첫 단계는 인문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관한 국가 차원의 종합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일일 것이다.

  과학기술분야의 경우 연구개발사업과 정보유통사업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자 하는 종합 계획은 1973년도에 기본적인 초안을 마련한 바 있다. 국제적인 정보 전문가의 자문에 의해 만들어진, 이른바 NASSTI (National System for Scientific and Technological Information) 구상2)이라고 하는 이 계획의 골자는 과학기술계의 분야별 연구기관을 전문정보센터화 하여  연구 기능과 함께 해당 분야의 정보를 수집․관리 기능을 병행하도록 하고 국가 차원의 종합정보센터를 두어 전문정보센터의 생산하는 정보를 종합적으로 유통시킨다고 하는 것이다.

  이 NASSTI 구상은 당시 과학기술처 산하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KORSTIC)를 중심으로 실행토록 예정되었으나 당시로서는 기반 시설의 미비, 정보화 마인드의 부족, 정부 정책의 일관성 부재로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다가, 1993년에 과학기술 정보유통 전담 연구기관인 연구개발정보센터(KORDIC)가 설립되면서 다시금 그 실천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2001년에는 KORSTIC의 후신인 산업기술정보원(KINITI)과 연구개발정보센터(KORDIC)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로 통합되어 NASSTI 구상에서 지향하였던 바를 오늘의  정보 기술 환경에 적합한 형태로 발전시키고, 2005년까지의 연차적 실천 계획을 수립하여 과학기술 지식 정보 유통 체제의 본격적인 가동에 돌입하였다. 이 체제는 KISTI가 과학기술 정보 인프라 지원 및 종합 유통의 기능을 수행하고 정부출연연구소와 대학의 분야별 연구소가 전문정보센터로서 정보 생산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함으로써 전문 연구 활동 중에서 수집․생산되는 지식 자원이 최단시간내에 정보화 되어 사회적 공유체제에 들어도록 하는 것이다.3)


  우리나라 과학기술분야의 정보화 사업은 지난 30년간 적지않은 시행착오를 거치기는 하였으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국가 차원의 종합적인 사업 계획 수립 및 관계 법령의 정비를 통하여 중․장기적인 수행 기반을 마련하였고, 이를 토대로 안정적인 사업 수행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인문 분야의 정보화 사업 역시 확실하고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서 국가적인 차원의 종합 계획 수립이 필요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인문 지식의 사회적 공유 체제 구축이라는 목표는 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일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재원의 확보가 요구된다.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2001년도에 정부에서 우리나라의 연구개발 사업에 투자하고 있는 예산은 4조 4천억에 이르며(정부의 일반 회계 예산의 4.4%), 이와는 별도로 정보통신부에서 투자하는 정보 부문의 연구개발비도 1조 8천억에 달한다.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콘텐츠개발 진흥을 위해 쓰는 지원금만도 연간 1천억 원이 넘는 규모이다. 창조적인 지식활동의 기반을 이루는 인문 지식의 사회적 공유체제를 구축하는 일에 연간 1천억 원 정도의 재원을 투자하는 것을 불가능한 일로 단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 사업은 아무도 그 필요성을 주장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 않은 일’일 뿐이지 결코 ‘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국가연구개발 사업은 소관 부처의 전문영역과 사회․경제적 목적에 따라 설정되는 ‘연구 사업’(프로그램) 레벨과 그 사업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행되는 ‘단위 과제’(프로젝트) 레벨로 나뉘어진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가연구개발 사업은 프로그램 단위에서 200여 개, 프로젝트 단위에서 20,000 개 정도가 수행되고 있다. 국가적인 차원의 인문 지식의 공유 체계 수립은 프로그램 레벨의 사업으로 추진되어야만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운영을 꾀할 수 있을 것이며, 소기의 사회․경제적인 목적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프로그램 레벨의 사업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부 또는 공공기관 관계자의 이해와 정책적인 협조가 있어야 한다.4) 그리고 그러한 협조는 설득력 있는 사업계획서와 인문학의 제분야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전문 연구자들의 공감대 형성을 통해 이끌어낼 수 있다.

  사업계획서 상에서는 우리나라 인문 분야의 연구활동 중 지식정보자원의 생산 체계와 접목시켜할 부분을 제안하고 그로부터 산출되는 정보의 유형과 정량적인 목표치, 분야별 수행 체계를 명확히 제시하여야 한다. 이와 함께 인문 지식의 정보화를 통해 얻어질 수 있는 사회․경제적인 기대 효과, 즉 인문 지식의 정보 자원화를 통한 문화 콘텐츠 개발의 촉진, 인문 분야의 지식을 기반으로 한 고급 정보 기술자의 양성 등 국가경쟁력 제고에 직결되는 사항들이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사업 계획의 수립은 인문 지식 정보화의 비전을 가진 인문학자들을 중심으로 기술적 타당성을 보완해 줄 정보 기술 전문가, 사회․경제적 기대 효과의 측정 방법을 제시해 줄 경제 분야의 전문가가 함께 참여함으로써 이루어 낼 수 있다. 어려움이 있다면 사계의 컨센서스를 모으는 후자의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 인문계 연구자들이 과연 인문 지식 정보화 사업에 대한 컨센서스를 결집하여 프로그램 단위의 연구개발 사업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급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이점에 있어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정보화의 공세에 대해 인문계 연구자들이 마냥 수세적인 입장에 있을 필요는 없으며 우리의 의지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정보화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을 인문학 연구의 발전 기반으로 삼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4. 인문 지식 기반 정보 인력의 양성


  인문 지식의 사회적 공유 체제 구축을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는 연구사업의 성사 여부를 떠나 인문학 연구자들은 적어도 학과나 대학 차원에서 전공 분야의 연구활동을 전자적인 체계 안에서 수행하고, 거기에 동참하는 학생들의 지식 정보 관리 능력을 배양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정보화는 연구자들이 연구와 집필을 완성하고, 종이로 된 책을 출간한 다음에  용역이나 저작권 사용 계약을 통해 그것을 다시 전산 정보로 재가공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오늘날의 정보화는 인문학자들의 학문 활동 그 자체를 전자적인 체계 안에서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1992년부터 『국역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전산화사업을 수행하여 1995년에 『조선왕조실록 CD-ROM』을 간행하였으며, 1996년부터는 국사편찬위원회와 공동으로 『한문 원전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 편찬 사업을 진행하였고, 현재는 역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수행하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정보화 사업의 기술감리역을 맡아 동 사업 추진 방향에 대한 기술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외부에서 볼 때에는 이 세 가지 사업이 다같이 고전 역사 자료를 디지털 데이터베이스로 간행하는 동종의 일로 보여지겠지만 추진 방법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95년의 『국역 실록』은 민족문화추진회,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1968년부터 수행해온 『실록』 국역 사업의 결과물을 디지털 정보로 재입력하여 DB를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양기관의 국학 연구자들은 1994년에 마지막 『국역 실록』 책자를 간행하는 것으로서 편찬 사업의 역할을 다하였고, 그것을 전산화하기 위해 데이터베이스를 설계하고 제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한자 서체를 개발하는 일 등은 전적으로 필자를 비롯한 전산기술 전문가들이 전담해서 수행하였다.

  국역실록 개발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데이터 편찬 업무에 착수한 『원전 조선왕조실록』의 정보화는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원전 실록』 자체는 조선왕조 500년간에 쓰여져서 이미 책자화 되어 있었지만, 개발자들은 단지 그 책의 내용을 그대로 전산화 것에 그치지 않고, 텍스트 전체에 중국 『25사(二十五史)』 편찬 방식의 표점(標點)을 부가하여 지식화된 정보를 산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 방법을 통해 실록의 모든 기사와 문장이 구조적으로 표현되고, 인명, 지명, 서명 등 고유명사에 대한 전거 제어가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디지털 데이터 편찬 작업은 전산 전문가들만의 능력으로는 수행할 수 없는 일이다.  당연히 표점 업무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전문 연구자들이 담당하였다. 필자는 그들에게 원전 실록의 디지털 DB 편찬에 적합한 마크업 기호의 사용법을 제공하였지만, 그 기호들을 어느 요소에 대해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역사 연구 전문가들의 지식과 고민에 좌우되었다.

  『승정원일기』 정보화 사업은 『원전 조선왕조실록』 사업과는 또다른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실록의 경우 국사편찬위원회의 역사 연구자들은 데이터의 편찬에만 관여하였지만, 이번에는 사업 기획에서부터 시작하여 정보 편찬, 정보 시스템의 기능 설계까지 그 기관에서 주도적으로 수행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정보화가 목적하는 바는 조선시대에 역사에 대한 지식을 소수의 전공자뿐 아니라, 가깝게는 인접 학문의 종사자에서부터 더 넓게는 작가, 언론인, 일반인까지 우리의 역사에 대한 지식 수요자들에게 폭넓게 제공하는 데 있다. 그러한 지식 공유의 기반을 조성하는 일이 이 기관 연구자들의 연구 활동과 동떨어진 별개의 일이 아니라 연구 업무 그 자체라고 하는 생각은 『실록』 사업 추진 당시까지만 해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실록』 사업의 경험으로 토대로 『승정원일기』 전산화를 자체 사업으로 추진하는 현시점에는 이 점을 사업 종사자 누구나가 인식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윈회의 역사 연구자의 경우 어느 누구도 지식 정보의 편찬에 대한 교육을 받은 바가 없다는 사실은 ‘전자적인 체제하의 연구 업무 수행’을 용이치 않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혹자는 기술적인 분야의 용역을 맡은 기업에서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학자들에게 XML 마크업 기호가 매우 생소한 외국어처럼 보이겠지만, 전산 전문가에게는 『승정원일기』의 모든 문장이 완전히 해독 불가능한 암호로 보일 뿐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반, 이과반을 나누어 인문 지식과 공학적 지식 사이의 벽을 쌓아온 사람들에게 이제 와서 긴밀하게 의사소통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인문 지식의 정보화가 인문학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면, 대학은 인문 분야 인력 양성의 과정에서부터 학생들이 지식 정보 관리자의 자질을 배양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인문학과 동떨어진 별개의 지식을 부수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지식을 다루는 학문 방법론의 일환으로 교육되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문학과 정보학의 긴밀한 학제적 연계. 이것을 필자는 ‘인문정보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과학 일반과 정보학의 연계를 운위하는 단계를 지나 분과 과학과 정보학의 밀접한 결합이 가속화되고 있다. 컴퓨터의 고속 연산 기능을 이용하여 인간 유전체의 데이터를 해석하고 응용 분야를 넓혀 가는 생물정보학(Bioinformatics), 신약의 선도물질(Lead compounds)을 찾아내고 최적화하는 과정을 더욱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룰 수 있도록 여러 가지의 자료를 정보화하고 지식으로 변환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화학정보학(Cheminformatics) 등이 그 일례이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역사 사료의 디지털 편찬은 인문 지식과 정보 기술의 연계 사례 중에서도 단순한 것에 속한다. 우리의 일상 언어를 컴퓨터의 처리 명령으로 자동 변환해 주는 자연어 처리나 외국어와 우리말 사이의 자동 번역, 컴퓨터가 인간의 목소리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음성 언어 처리 기술, 컴퓨터가 지식에 기반한 판단 능력을 갖도록 하는 전문가 시스템의 개발 등 컴퓨터에 지적 능력을 부가하는 고급 정보 기술들은 모두 인문 분야의 지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들이다. 

  인문 지식이 정보 기술과 결합하여 미래의 정보화 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 분야는 무한히 넓게 열려 있다. 오히려 인문지식과의 연계가 끊어진 정보화는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과 정보학 두 영역은 저절로 만나지는 것이 아니다. 양 분야의 전문 지식이 상호 교류할 수 있게 하는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대학에서 인문학과 정보 기술 양쪽을 아우르는 인력을 양성할 수 있기 위해서는 두 분야에 연관된 학제적 연구 활동들이 교과목의 형식을 갖추어 교육 커리큘럼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인문분야의 지식 정보 DB의 편찬, 인문 분야 전문 용어의 씨소러스의 개발,  자연어 처리에 필요한 언어 자원의 관리 등은 인문 지식을 다루는 일이면서 정보 기술의 도입을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학제적 활동이다. 학생들은 교육과정 내에서 이러한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인문학과 정보기술 두 방면의 지식을 함께 습득하고 양쪽을 더욱 긴밀하게 소통시킬 수 있는 안목을 키워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정보화의 열풍은 대학에서 인문계통의 학문을 위축시키는 적대적 힘이 될 수도 있고, 인문학의 위상을 제고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우호적인 영향력이 될 수 있다. 그 방향이 어느 쪽으로 결정되는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대응 자세 여하에 달려있다. 인문정보학이라고 하는 것은 정보 기술을 인문 분야의 연구․교육 활동에 접목시켜 인문 지식의 사회적 공유체계를 구축하고, 아울러 그 체계 안에서 훈련을 받은 인문학 전공자가 정보 전문가로서 정보화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자는 제안이다.  정보화의 공세에 대한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 우리 스스로 인문 지식이 정보 기술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인력을 양성해 간다면 정보화 사회에서의 인문학은 선도 학문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책임연구원, 정보시스템부장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2) 1973년 당시의 과학기술처는 과학기술정보 유통활동을 국가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KORSTIC)를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과학기술정보 유통 시스템의 구축을 구상. 이를 위해 영국의 그로간 교수를 초청하여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정보 활동에 관한 현황을 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국가 과학기술 정보 유통 시스템(National System for Scientific and Technological Information, NASSTI) 구상을 발표하게 하였다. “한국을 위한 과학 정보망 - 권고를 겸한 보고서”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에는 다음 네 가지 사항에 대한 권고와 그 실천 방안이 제시되었다.

   ① 과학기술정보의 국가정책을 재정비하는 조기조치를 취할 것.

   ② 과학기술정보 서비스를 국가 주요 연구기관들의 임무로 규정할 것.

   ③ 공공자금 지원을 받은 기관들의 과학기술정보 유통에 대한 협력을 강화할 것 - 과학정보유통망 설치.

   ④ 외국의 과학정보 유통기구와 유대관계 유지


3) 『지식정보자원관리법』에 의해 2000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정보통신부의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도  지식영역별로 종합정보센터-전문정보센터 간 역할 분담 체계를 수립하여 연구현장에서 생산된 공공 분야의 지식 정보가 바로 유통 서비스에 연결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4) 프로그램 단위의 국가연구개발사업은 20개 정부부처에서 기획안을 마련하여 기획예산처의 예산 승인을 받음으로써 사업화되며, 프로젝트 단위의 연구과제는 부처 산하 과제관리기관에서 선정․평가 업무를 담당한다.